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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2. 정사

by 엽미술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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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는 청대 황제의 명으로 정식 인정한 24개의 역사서로 이십사사라 불리기도 한다. 정사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지수가 사망한 후, 서진의 황제가 『삼국지』를 공개하면서 『사기』와 『한서』를 잇는 '정사'라고 표현한 것부터이다. 당나라에서도 사관제도가 정착하면서 이 정사라는 용어도 정착하였고, 『수서』 경적지에서도 4부 분류 중 정사도 포함이 되었다.

 정사는 전 왕조에 대해 현 왕조가 저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전 왕조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자, 전 왕조의 사대부 층을 전 왕조의 역사 서술에 참여하게 하면서, 전 왕조에 대한 마지막 의를 다하게 해 줄 기회였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현 왕조의 사업이기에 결국 사대부들은 현 왕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는 효과도 가졌다. 또한 이 정사의 저술은 현 왕조가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 일이기도 했기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찬, 즉 개인이나 그 일가가 저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것을 후에 국가가 인정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이 개인이나 그 일가들도 대부분은 왕조의 핵심과 연관이 된 인물들이었다. 이후에 사관제도의 전개에 따라 관찬, 즉 나라에서 관을 두고 간행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에 따라 관찬의 폐단 또한 생기게 된다.

 한대 이전의 사관은, 넓은 의미에서는 사관으로 할 수 있으나, 아직 역사 편찬 업무가 전문화되지 않았다. 이때의 그들은 기록 전반을 담당했고, 업무가 연장되며 역사 기록 기능도 수반하게 되었다.

 한대가 되자 역사 서술이 본격화되고 국가 권력, 즉 관에서는 공식적인 역사 찬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후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사서의 저술이 성행했는데, 동시에 역사 편찬이 전문적인 일로써 제도화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이로써 사관에 의한 관찬 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나라에 이르러 정착되게 된다.

  • : 난대영사는 어사대부에 속하고 문서를 관장하는 성격을 가짐. 전문적 사관으로 보기는 어려움.
  • 삼국~진 : 위의 명제가 저작랑을 설치했고 이가 사관 계열 직책의 효시이다. 이것이 진으로 이어졌다. 위에서는 중서성, 진에서는 비서성에 속해 문서 초안까지를 맡고 비서로서의 측면이 컸다. 진에서는 좌저작랑, 저작좌랑은 자료를 수집, 대저작랑은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사서를 편찬했다.
  • 남조 : 남제·량에서는 중서성 또는 비서성 아래에 저작국을 두고 저작랑 또는 수사학사를 임명했다.
  • 북조 : 역사 편찬을 직위가 낮은 저작랑 등에 전담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인식하여, 총괄 책임을 맡는 감수국사의 직책을 두고, 보통은 재상이 겸직을 하게 했다.
  • : 사관제도가 정착하면서 관찬체제가 확립되었다. 문하성 옆에 사관(史館)을 두어 본격적으로 역사를 편찬했다. 이에 따라 이전에 있던 저작국은 유명무실해졌다. 이 사관(史館)에서는 편찬한 사서로는 또한 실록과 국사가 있는데, 실록은 편년체로 직전 황제의 역사를 편찬했고, 이는 개개 황제를 단위로 진행되었다. 국사는 기전체로 서술하며 본조사로 진행되었다. 또한 불규칙하게 필요가 있을 때, 특정 시기에 편찬하였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사료의 수집과 정리

 기거주 : 사건→일→월→시(사계절)→년 순서로 정리되었다. 남북조 때 이미 기거주관이 있었다.
 시정기 : 재상의 업무 기록으로, 재상이 스스로 저술했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 재상 요도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록보 : 각 관청의 업무와 사건을 쓴 것으로, 그 종류와 분량이 매우 많았다.
 일력 : 위의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저본이다. 당대의 원화년간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지』를 처음으로 정사로 언급하며 앞선 사서 중 정사로 여겨진 것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였다. 공자의 『춘추』를 최초의 사서로 본다고 말했으나, 제대로 된 '사서', 체계가 잡힌 사서라는 의미에서 그 최초는 사마천의 『사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먼저 정사로 인정되는 사서 중 최초인 사마천의 『사기』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1. 사기

 1) 사마천의 일생

 그의 자세한 일생에 대해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여기서는 간략히 만 다루도록 하겠다. 본래 『사기』는 그의 아버지 사마단이 편찬을 계획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아버지의 직위인 태사령을 사마천이 계승하고, 그 유지를 잇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이 이릉 장군의 화에 연루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사마천의 당시 가졌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마천은 또한 여기서 궁형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에는 궁형을 받느냐, 아니면 죽느냐를 선택하게 돼있었다 한다. 여기서 사실 궁형을 받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의 저술이라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런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남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이후로도 궁형으로 인한 사회적, 신체적 고통은 그의 한평생을 따라다니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궁형을 택해 살아남은 것에 대해 무시받았고, 신체적으로 느끼는 궁형의 고통은 하루에도 9번씩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사마단의 학문 취향은 도가 쪽이었기 때문에, 사마천도 그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때문에 거대한 스케일의 체제를 구상했고, 정치적 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인물의 군상에까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마천에게도 유가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영향이 이후의 사가들과 처럼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기의 목차

12
본기

 
1. 오제본기
2. 하본기
3. 은본기
4. 주본기
5. 진본기
6. 진시황본기
7. 항우본기
8. 고조본기
9. 여태후본기
10. 효문본기
11. 효경본기
12. 효무본기
 
10
 
1. 삼대세표
2. 십이제후연표
3. 육국연표
4. 진초지제월표
5. 한흥이래제후왕연표
6. 고조공신후자연표
7. 혜경간후자연표
8. 건원이래후자연표
9.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10.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8
 
1. 예서
2. 악서
3. 율서
4. 역서
5. 천관서
6. 봉선서
7. 하거서
8. 평준서

30
세가

 
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5. 관채세가(管蔡世家)
6. 진기세가(陣杞世家)
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9. 진세가(晉世家)
10. 초세가(楚世家)
1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2. 정세가(鄭世家)
13. 조세가(趙世家)
14. 위세가(魏世家)
15. 한세가(韓世家)
1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18. 진섭세가(陣涉世家)
19. 외척세가(外戚世家)
20.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1. 형연세가(荊燕世家)
22.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3. 소상국세가(簫相國世家)
24.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5. 유후세가(留侯世家)
26. 진승상세가(陣丞相世家)
27. 강후주발세가(綱侯周勃世家)
28.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29. 오종세가(五宗世家)
30. 삼왕세가(三王世家)
 
70 열전
 
1. 백이 열전
2. .안 열전
3. 노자.한비 열전
4. 사마양저 열전
5. 손자.오기 열전
6. 오자서 열전
7. 중니제자 열전
8. 상군 열전
9. 소진 열전
10. 장의 열전
11. 저리자.감무 열전
12. 양후 열전
13. 백기.왕전 열전
14. 맹자.순경 열전
15. 맹상군 열전
16. 평원군.우경 열전
17. 위공자 열전
18. 춘신군 열전
19. 범수.채택 열전
20. 악의 열전
21. 염파.인상여 열전
22. 전단 열전
23. 노중련.추양 열전
24. 굴원.가생 열전
25. 여불위 열전
26. 자객 열전
27. 이사 열전
28. 몽염 열전
29. 장이.진여 열전
30. 위표.팽월 열전
31. 경포 열전
32. 회음후 열전
33. 한신.노관 열전
34. 전담 열전
35. ...관 열전
36. 장승상 열전
37. 역생.육고 열전
38. ..괴성 열전
39. 유경.숙손통 열전
40. 계포.난포 열전
41. 원앙.조착 열전
42. 장석지.풍당 열전
43. 만석.장숙 열전
44. 전숙 열전
45. 편작,창공 열전
46. 오왕비 열전
47. 위기.무안후 열전
48. 한장유 열전
49. 이장군 열전
50. 흉노 열전
51. 위장군.표기 열전
52. 평진후.주보 열전
53. 남월 열전
54. 동월 열전
55. 조선 열전
56. 서남이 열전
57. 사마상여 열전
58. 회남.형산 열전
59. 순리 열전
60. .정 열전
61. 유림 열전
62. 혹리 열전
63. 대원 열전
64. 유협 열전
65. 영행 열전
66. 골계 열전
67. 일자 열전
68. 귀책 열전
69. 화식 열전
70. 태사공 자서

 2) 사기의 체제

  • 본기 : 기초가 되는 연대기라는 의미로, 당나라 사학자 유지기에 따르면 본기의 '기'는 실같이 맺어준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마천의 독창은 아니고 『여씨춘추』 중에서 기 60편, 『우본기』를 참조한 것이다. 후대 주석가가 『사기』에 삼황본기를 보충해 넣은 적도 있는데, 이는 후대의 주석가가 사마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사마천은 진말의 내란기의 항우에 대해 항우본기를 쓰는 등, 분열기에 대해서도 단일한 주제를 설정하고, 통일된 세계의 지속이라는 관념을 확립시켰다.
  • 연표 : 연표는 사마천의 발명이다. 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한 표를 만들었다.
  • : 제도, 문물을 서술한 것으로, 사실을 일정한 범주로 나눠 정리했다. 여기서는 예리한 비평가적 관점이 드러난다.
  • 세가 : 제후로서 세습된 가문들을 정리한 것으로, 대대로 계승되는 가문이라는 뜻이다. 진 통일 이전 제후의 연대기가 남아 있지 않은 지금에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본적으로 대대로 계승되는 가문에 대해 쓴 부분이지만, 공자세가와 진섭세가는 예외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 열전 : 정치적으로 비중이 높은 인물 외에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주목한 것이다. 첫 열전이 백이열전은 당시의 비중에 국한하지 않고, 후세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을 선정한 것이고, 이외에도 유협열전, 자객열전, 골계열전, 화식열전 그리고 이민족의 열전인 흉노열전, 조선열전, 남월열전 등이 있다. 마지막 편은 태자공자서로 스스로에 대한 것을 썼다. 

 『사기』는 최초의 기전체 사서로 평가받는데, 기전체란 여기서 핵심이 되는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합친 것이다. 기는 기본적으로 왕의 행적이나 정치를 중심으로 편년체 서술을 한 것이라면, 전은 각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전체 방식은 이후로도 정사의 방식으로 채택된다.

3) 사기의 서술 특징

 (1) 술이부작

 술이부작이란,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이는 공자의 입장을 사마천도 유지한 것이다. 상당 부분의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을 가져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견해는 '태사공왈'이라고 매편의 말미에 첨가하였다. 이는 후일 논찬의 효시가 된다.

 (2)인과론에 근거한 저술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를 따져 저술하였다.

 (3)합리주의적 서술 태도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에 근거를 두어 성실한 저술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유사한 설들이 있다면 모두 제시하였고, 단정적인 태도를 피하였다. 또한 삼황본기를 쓰지 않은 것도 합리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연표의 경우에도 기원전 841년을 기년으로 하였고, 그 이전은 부정확하다 하여, 세대만을 표시하였다. 즉, 후대가 다른 기록들에서 뽑아내어 연대표를 따로 만든 것은 사마천의 본의를 오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장점만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신화를 배제하고 합리적인 사실만 취한 결과, 역사 이전 및 문명 초기 단계에 대해 서술이 무미건조하다는 평이 생기기도 했다.

 (4)문사일치의 서술

 이는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 서술의 객관성의 문제인데, 당시에 역사가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기』가 문학적 방식과 철저히 분리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기』에 독특한 맛을 내는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쁘게만 볼 부분이 아니기도 하다.

4) 사기의 유통

 사마천의 사후 곧 유통되기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태사본기' 혹은 '태사공서'라고 불렸고 무제본기 등 수편이 소실되어 이후에 보완되기도 했다. 『사기』로 불리게 되는 것은 후한 말의 역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던 순열이 이를 『사기』라고 칭하면서부터였다.

5) 사기의 의의

 사마천은 중국 역사가 한무제의 성공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기전체라는 방식을 택해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가 역사학이라는 학문으로 성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거시었다. 또한 중국 역사를 하, 은, 주로 이어지는 중원 중심의 일계적 역사의 발전으로 서술하면서, 중원중심적 역사관을 완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나아가 5제의 체계화라는 의의를 남기기도 했다.


2. 한서

1) 반고와 한서의 편찬

 한서의 편찬자는 반고이다. 그의 아버지인 반표는 후한 초에 전란 시기, 지방 실력자들에게 의탁했다. 반표는 그 높은 식경으로 평판이 높였기에, 서현의 현령 등을 역임하고 중앙에도 수 차례 천거되었다. 그는 『사기』를 계승할 목적으로 후전을 저술했는데, 반고가 사마천처럼 부친 사후 그 작업을 이어받아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반고는 '사개작국사', 즉 사사로이 국사를 개작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명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후에는 국가 후원 하에 계속 저술을 하며 명제 이후에도 궁정 문예인으로 활약했다. 또한 외척 출신 실력자였던 두헌의 흉노 정벌에도 참모로 참여하며, 두헌과도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화제(和帝) 시기에 환관들이 두헌을 제거하자, 반고 역시 빈객으로 연루되어 투옥되고 옥사하게 된다. 이후로 누이동생 반소를 통해 동관과 장서각이 작업을 잇게 하였다. 이들 이후에는 마융, 마속 형제가 작업을 계승해 완성하게 된다.

2) 한서의 체제

기, 표, 지, 전으로 이루어졌다. 『사기』와 비교해 '세가'가 없어지고 '지(서)에 형법지, 지리지, 예문지 등이 추가되어 더 충실해졌다.

3) 한서의 특징 및 의의

 최초의 기전체 단대사였다. 이는 통사와 대비되는 개념인데, 사마천의 『사기』는 태고 때부터 전한의 한무제 때까지를 통사로 저술하였다. 이에 비해 반고는 기전체를 채용하면서도, 시대를 한 왕조에 한정하여 기술하는 '단대사' 방식을 택해 이 단대사의 형식을 확립하였다. 이후 역대 왕조의 정사는 모두 기전체에 의한 단대사로 편찬되게 된다.

 사찬이지만, 국가 후원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찬의 성격이 가미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후 역사가들은 『사기』와 『한서』를 역사의 양대 모델로 비교했으며, 당의 역사가 유지기도 기전체를 사기가와 한서가로 2분할하였다.

 『사기』가 그 체제의 독창성 때문에 호평을 받았다면, 『한서』는 자료 선택의 신중함과 서술의 치밀함 (반표, 반고 부자는 『사기』에 대해 너무 넓게 다루어 논의가 깊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특히 그 유학적 관점이 명확했기 때문에 중국 사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3. 삼국지

1) 진수와 삼국지 

진수의 삼국지로도 알려진 정사 삼국지는 소설 삼국지연의 덕분에 더욱 잘 알려지기도 했다. 이를 쓴 진수는 역사에 조예가 싶던 초주에게서 수학했으며, 원래는 촉나라에서 사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서진의 통일 후에도 저작랑 등을 역임하며 사관 활동을 계속했다. 『삼국지』의 편찬의 기초 자료로는 위와 오의 관찬 국사를 활용했고, 사찬이었던 『위약』도 활용되었다. 촉은 그의 자국이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아는 바가 위와 오에 비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으로 삼국지가 완성되었다. 위, 촉, 오 삼국을 각기 서술하면서도 본기는 '위지(위서)'을 인정한 점은 후일 정통론의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이는 그 정통을 위에 두느냐, 촉에 두드냐의 논쟁이었다.

2) 삼국지에 대한 평가

 『삼국지』는 먼저 간결하고 정리된 서술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또한 너무 간략하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상세하게 보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보충은 지나치게 상세하여, 진수가 버린 내용을 쓸데없이 다시 모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 보충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4. 후한서

 1) 후한서의 저자 범엽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은 남조의 송 문제 시기에 재능과 학문으로 평판을 얻었다. 또한 당시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는 당시의 청담사상의 유행 풍조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의 실력자이던 팽성왕 류의강의 후원을 받았다. 관직은 이부랑과 지방관 등을 거쳐 태자첨사에 까지 오르게 된다. 그가 후한서를 집필한 계기는 이 류의강과 일시적으로 불화가 생겨, 지방관으로 좌천 당한 것이었다. 이 때 자극을 받아 그는 후한서의 집필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팽성왕 류의강과 모반을 도모한다는 죄명으로 투옥되어 기시에 처해져 사망하게 된다. 이 기시란 고대 중국의 형벌로, 공개장소에서 참수·교수형을 하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다.

2) 후한서의 내용과 평가

 기존에 후한의 역사서가 다수 있었으나, 내용이 미흡한 것들이었다. 범엽은 생전에 본기 10권, 지 10권, 열전 80권으로 계획했으나, 처형으로 인해 이 중 지 10권은 만들지 못했다. 현재 『후한서』에 실린 지 8종은 이후 사마표의 『후한서』에서 따다가 붙인 것이다. 후한서는 그 고증이 철저한 것으로 인정받는데, 당나라 장회태자가 주(注)를 정리하면서 이전에 편찬되었던 11종의 후한 사서들을 제치고 후한시대에 대한 유일한 정사로 인정받았다. 이는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5. 송서

남조
 송 - 제 - 양 - 진

 송서의 저자는 심약인데, 남제 영명 5년에 명을 받아 다음 해 2월에 완성하는 이름과 달리 빠른 찬술 속도를 보여준다. 이는 송 시기에 이미 본조사를 서술했던 덕이 있을 것이다. 송 시기 저작랑이었던 하승천은 『송서기전』의 편찬을 시작하고, 이후 서해가 저작랑으로서 국사를 완성했다. 심약은 이를 저본으로 하여 단기간에 편찬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송서로는 손연과 왕지심의 송대사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실전되고 말았다. 또한 이 『송서』의 지는 『삼국지』를 보충하는 것으로도 이용된다. 이 송서를 포함한 이후 3권은 남북조 시기에 편찬된 정사들이다. 또한 이 송은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 송, 제, 양, 진 중의 송을 의미한다. 

 


6. 남제서

남조
송-  - 양 - 진

 『남제서』는 양나라 때, 소도성의 증손인 소자현이 지은 것인데, 남조의 제나라 때 소도성이 사관을 두어 단초와 강엄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명했다. 양대에는 이외에도 제나라에 대해 심약의 『제기』와 오균의 『제춘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저자인 소자현이 남제의 황실이었기 때문에 그 개국 황제였던 소도성의 찬탈을 비호한 바가 많고, 아버지였단 예장왕에 대해서도 전기를 썼다. 열전 중에서 많은 사실을 폭로하였고, 당시의 사람이었던 이유로 당시의 자료가 많이 있었다. 문학, 사상, 과학사 방면을 적당하게 배분하고, 불(佛)과 도(道)의 대립을 언급하기도 했다.


7. 위서

북조
        ↗ 동위 → 북제
북위
        ↘ 서위 → 북주

 저자인 위수는 북제 문선제 때, 중서령으로 저작랑을 겸했다. 북위는 도무제 때부터 국사의 편찬을 시작했는데, 이후 최호, 고윤 등이 이를 이었다. 이는 편년체로 서술되었었는데, 효문제 때부터 기전체로 바뀌는 동시에 기거주의 편찬도 시작되어서 사료가 더욱 충실해졌다. 위수는 이미 북위 말에 기거주 및 국사의 편찬에 참여한 바가 있었다. 북제가 들어서고, 북제 초에 문선제는 사국을 설치했다. 여기서 방연우 등 6인이 『위서』를 편찬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위수 1인에 의해 완성된다. 이 『위서』가 완성된 후, 기존의 위를 다룬 역사들을 모두 태워버려서 현존하는 『위서』는 좋게 평가되지는 않는다.


 

남조
송- 제 - 양 - 진

 

북조
        ↗ 동위 → 북제
북위
        ↘ 서위 → 북주

 

8. 양서

9. 진서(陳書)

10. 북제서

11. 주서

 당태종은 재통일의 업적과 당 왕조의 안정을 과시하기 위해 남북조 후반의 네 왕조와 수나라의 정사를 편찬하게 했다. 또한 이 5개의 정사의 지를 묶어 『오대사지』를 편찬한다.

12. 수서

 당시 사관 제도가 완성되었다 평가받는 당나라였기에 역시나 관찬으로 편찬되었고, 위징이 감수 책임을 맡았다. 당태종시기의 5대 정사를 완결 짓는 성격을 가졌다. 『오대사지』 30권을 포함하게 되어 지의 비중이 과도해졌다. 경적지는 목록학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고, 4부와 경사자집의 분류 방식이 정착되었다. 천문지도 좋은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13. 진서

 당나라 정관 18년, 『진서』 역시 관찬으로 완성된다. 당나라 재상이었던 방현령이 이를 감수했다. 이 진서의 진은 사마의의 진(晉)이다. 이를 편찬할 때만 해도 당시 18가들에서 나온 진사가 존재했다. 이를 참조하여 새로 편찬한 것이 『진서』이다. 제기, 지, 열전, 전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진과 동진을 계승해서 파악했다. 또한 서진 멸망 후 나타난 5호 16국을 재기(載記)로 따로 취급한 것은 다른 진사(晉史)와도 공통되었다. 천문지와 율력지, 오대지는 천문학자였던 이순풍이 집필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팔왕의 난, 구품중정, 청담의 유행 등의 내용도 들어있다.


14. 남사와 15. 북사

 이대사가 시작해 아들인 이연수가 완성한 사서이다. 둘 다 본기와 열전을 가진 구조로 되어있다. 이미 당나라 시기에도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던 남북조의 역사에 대해서 복잡함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이를 통사로 개작할 필요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이대사는 남북조 전 역사에 대한 오류와 남조, 북조의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고자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를 이연수가 가학으로써 계승하였고, 17년에 걸려 완성해 황제에게 바치게 된다.

 정사로 인정되고 편리함과 그 시각 때문에 유행하며 다른 다수의 남북조 정사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명, 청 때 남북조의 정사를 복원하며 거꾸로 남사와 북사를 복원하기도 했다.

 통사체의 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본기는 왕조를 전부 묶어 진행되었고, 열전의 경우는 개인이 아닌 가계에 따라 묶어서 서술되었다. 이러한 가계에 따른 서술은 당시 남북조가 연속성이 강한 데다가 문벌 지배의 사회인 탓에 가계가 중시되는 것이 맞았다는 이유로 그 타당성이 인정되었다.


16. 구당서

1) 구당서의 편찬

 이는 5대 시기에 후진 초, 유후 등에 의해 관찬되었다. 당대에 이미 사관제도가 정착되고 국사도 편찬되고 있었기에, 자료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처음 감수국사는 재상 조영이 맡았다가, 후에 유후가 재상으로서 작업을 끝마쳤다. 이는 『신당서』가 유행하며 유통되지 않다가, 명의 문인전에 의해 복원, 완각 되었다.

2) 구당서에 대한 평가

이후 송 초기에는 평가가 좋지 않았으나, 이후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문인전은 이에 대해 상술되어 있고, 박학하다고 평가했다. 『사고전서결목제요』에서는 본기는 간략하면서도 체계 있고, 열전은 서술이 섬세하고 명확하며, 반고와 범엽의 법도를 실현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 이후가 잡다하게 되어 수미일관 하지 않다고 하기도 한다.


17. 신당서

1) 신당서의 편찬

 이는 송의 구양수와 송기가 편찬하였다. 인종 때, 『구당서』가 기력이 빈약하고 이의가 번잡하다 하여 재편찬을 명하였는데, 회공량이 편찬을 관장하였다. 본기, 지, 표는 구양수가, 열전은 송기가 분담하여 편찬했다.

2) 신당서의 특징

  • 본기 : 구당서가 당시의 문체를 사용한 것에 비해, 신당서는 고문체를 사용했다.
  • : 선거지, 병지, 의위지 등이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 : 재상표, 종실세계표, 방진표(절도사) 등이 시대적 특징을 반영했다.
  • 열전 : 공주열전은 측천무후 등 여화(女禍) 등이 많았음을 반영하였고, 번진열전 또한 특이했다. 간신, 반신, 역신열전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편찬자의 입장을 반영하였고,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을 많이 이용하였다.

3) 신당서에 대한 비판

회공량 : 편찬의 책임자로서 사적(事跡)은 전보다 늘었으나, 문장을 줄어들었다고 자찬했다.

유안세 : 회공량의 지적을 인정했으나, 시대가 뒤로 갈수록 문장이 번잡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오진 : 후대로 갈수록 비난이 거세지는 가운데, 오진이 『신당서구류』에서 구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청대 고증학에서의 비판

전대흔 : 오진의 비판을 인정하면서도 신당서를 옹호하였다.

조익 : 『이십사사차기』에 구당서와 신당서 각각의 장단점을 상세히 썼다. 양자의 본기를 비교해보자면, 『구당서』는 너무 상세하고, 『신당서』는 너무 간략하다 하였다.

『사고전서총목제요』 : 한 시대의 사서란 한 사람 손으로 나오면 정력이 많이 들고, 여러 사람의 손으로 나오면 체제가 복잡해진다. 오진이 비판한 것은 고증에 대한 한 옳으나, 이것만으로 『신당서』의 전모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왕명성 : 『십칠사상각』에서 잘된 것이 표, 지 열전, 본기의 순서라고 평했다.

내등호차랑 : 구양수와 송기의 의도는 문장에 있었기 때문에, 고증에 소략해진 것은 당연하다고 평했다.


18. 구오대사

1) 구오대사의 편찬

설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태조의 칙명으로 설거정이 감수국사를 맡고, 노다손 등 6인 혹은 7인이 편찬하였다. 『원사』를 제외한다면 가자 단기간에 완성되었고, 실록이 이미 편찬되어있었기에 이를 토대로 단기간 완성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각 왕조별로 분리 서술한 뒤 합본하였다. 각 왕조별로 본기와 열전을 가진다.

2) 구오대사에 대한 평가

 신오대사가 나온 뒤, 위축되어 금에서는 궁실 금고에서 서적을 제외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전서 집성시에 소진함 등이 100여권의 책을 수집할 때 재구성되어 8~90% 정도 복원되었다. 이렇듯, 송나라 초부터 평가가 좋지 않았으나, 사실 기록이 자세하고 참고한 문헌의 양도 많아 저술 시기가 빨라 그 견문이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쓸 때나 호삼생의 주(注)도 오대의 역사를 쓸 때는 『구오대사』를 주로 참조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19. 신오대사

1) 신오대사의 편찬

 이는 구양수가 신당서를 편찬할 때, 오대사를 개인적으로 사찬한 것으로 그가 『오대사기』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가 사망한 뒤 공개되어 유행하게 된다. 체제에 있어서는 여러 왕조를 항목별로 모아서 함께 서술했다. 본기, 열전, 지에 해당하는 '고', 십국세가, 그리고 부록으로 십국세가연보와 사이부록이 있다. 여기서 열전은 휘전, 가인전, 사절전, 사사전 등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분류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지에 해당하는 고(攷)는 사천고와 직방고 뿐으로 지나치게 간략하다는 특징을 가졌다.

2) 신오대사에 대한 평가

 춘추필법에 의거하자면, 서법이 근엄하여 인신의 귀감이 되고, 사마천이나 반고가 되살아났다는 등의 호평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명분론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예로 난세에 양신전이니 주신전이니 왕조별로 신하를 구분하는 것이 가소롭고, 심지어는 논찬의 첫머리 구절을 따 '오호사(嗚呼史)'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문장이 고결하고 간략하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현대 역사학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사실 서술이나 자료의 보완이 미흡하고 너무 가치관에 치우쳤다고 평가한다.


정통성의 문제
 송, 요, 금의 역사에 있어서는 몽고족의 원이 중국화가 진행되며, 수 차례 앞 왕조에 대한 역사를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3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데, 이는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한 정복왕조였기에, 정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정통성 부여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마지막 황제인 순제 지정 3년에 5년에 걸쳐 완성되게 된다. 이들은 구양현이 실제 편찬 책임자로서 총괄을 하고, 메르키트 왕족 출신인 톡토가 감수를 했다. 3사를 통합하지 못하고, 각기 분리해 편찬했는데, 결국 정통론의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남았다. 이는 이민족 왕조로서 한족의 송조를 잇는다는 의식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0. 송사

 완성 이전에도 수 차례 편찬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자료를 그저 나열만 하는데 그쳐서 악평을 받았다. 정사 중에서는 가장 분량이 많고, 사료집으로서의 의의 정도가 남았다. 사소한 업적이나 일화까지 모두 장황하게 표기하였고, 비판 없이 자료만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쳐, 사관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림열전이 있음에도 새로 도학열전을 만들었다는 특이점이 있어 주목받기도 한다. 또한 외국열전과 만이열전을 구분하였고, 외국열전을 시초로서 주변 민족들을 배치해 서술했다.


21. 요사

 편찬에 이용한 저본이 뛰어남 때문에 호평을 받는데, 이 저본은 『황조실록』,『(구)요사』,『계난국지』 등이었다. 영위지는 부족사회와 군사조직, 부족표와 속국표는 복잡한 민족 구성과 대외관계 이해에 도움을 준다. 마지막 권인 국어해는 거란 용어들에 대한 주석이다. 계난문자 연구에 기본 자료로 활용된다.


22. 금사

 금의 실록이 잘 갖추어져 있고, 금 지식인들은 역사에 관심이 컸다. 저본으로 『시조이하십제실록』 등의 금의 역대 실록과 원호문 등의 저술은 좋은 보완 자료로 역할을 했다. 정리도 잘되어있기에 송, 요, 금의 3사 중에서는 가장 호평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외국 열전이 있고 서하와 고려만 수록되어 있다.


23. 원사

1) 원사의 편찬

 명태조 홍무 2년에 편찬이 시작되었다. 송연과 왕의 등이 주도해 봉칙을 편찬하였다. 당시가 건국 초의 불안정한 시기였기에 편찬 기간도 극히 짧았는데. 이 정사의 편찬은 정권의 정당성의 인정과 지식인 회유가 목적이었다. 처음에 대도에서 가져온 13 황제 실록과 『경세대전』이 주 자료로 이용되었다. 또한 은둔 중인 학자들을 징발해 편찬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원의 순제 이후는 자료 부족으로 빠진 채 완성되었다. 이때가 159권으로 완성되었는데, 홍무 3년에 다시금 210권으로 완성시켰다. 내용은 본기, 지, 표, 열전의 기본적 구성으로 되어있다.

2) 원사에 대한 평가

 1차와 2차를 합쳐도 1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편찬이 되어, 질이 좋지 않다. 중복이나 오류가 많고, 설불태, 속불태는 한 사람인데 2개의 열전으로 만드는 등의 실수가 여러 번 나온다. 또한 몽골인이나 색목인들의 음역이 통일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료적 가치가 크고 『대원통일지』나 『경세대전』이 사라진 지금에는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이후 청말에 홍균이 유럽에서 몽고 연구가 극성함 보고 놀라, 몽고학 연구서를 수집해 『원사역문증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원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신원사』
 청초 이래 계속된 개인적인 개작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몽고 및 아랍 등의 신 자료로 보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부적인 오류가 많고, 기존 『원사』를 고치면서 그 근거를 제시 안하기도 했다. 민국시기에 가소민이 편찬하고 대총통이었던 서세창이 정사로 인정하여 이를 포함해 정사 25사로 보기도 하지만, 왕조가 사라진 근대에 인정된 것이기에 이가 온전히 인정되지는 않는다.


24. 명사

1) 명사의 편찬 

당시 중국을 지배한 청은 중국 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그러한 만주족 정권에 의해 『명사』의 집필은 청 초기부터 시도되었다. 본격적으로는 강희 18년에 시작하여 60년이 걸려 건륭 4년에 완성되었다. 감수자는 장정옥이었다. 편찬을 황종희에게 의뢰했으나 그가 고사했기에, 실제 편찬은 황종희의 아들과 제자들이 했다. 황백가, 만사통, 만사대가 주관하여 편찬하였고, 서전학, 왕홍서, 전조망, 주이존 등도 참여해 편찬했다. 여기에는 당시의 고증학 학풍이 반영되었다.

 내용은 본기, 지, 표, 열전, 목록으로 구성되어있고 『명사예안』에 『명사』의 편찬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정사의 편찬은 『통감강목』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사실만 기록하고,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2. 『송사』 이후 관례로 된 '도학전'을 만들지 않는다. (이는 송학에 대한 반감이었다.)
  3. 야사를 이용하지 않고 실록을 이용한다. (이는 신빙성 있는 사료에 근거를 둔 역사 편찬을 위함이었다.)

2) 명사에 대한 평가

 사관제도 하에 진행된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쳐 신중히 추진되고, 뛰어난 사가(史家)들이 참여하여 체제도 잘 잡히고 우수한 사서로 평가받는다.



 청을 마지막으로 '왕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즉, 정사를 인정할 '왕조'가 사라진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 왕조인 청의 역사에 대한 정사를 저술할 주체 또한 사라졌다. 물론 이후로도 정사라 주장하는 것들이 나오긴 했으나,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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