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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7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9. 유물사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의 중국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와 사회 사상으로 뿌리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공산당의 노선 결정을 위한 정치적 필요, 혁명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함과 결합을 위해, 그리고 사회 발전 단계에 대한 논쟁으로 일어났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독서잡지』에서는 '중국사회사논전' 특집호를 4책으로 출판했다. 사회사논전은 정책 노선 위주의 논쟁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중국에 유물사관이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곽말약의 『중국고대사회연구』에서는 본격적으로 유물사관에 입각한 시대구분이 시도되기에 이른다. 즉 원시공산체제인 모계 씨족사회, 노예사회, 봉건제 등으로 사회의 발전 양상 단계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 구분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았는데, 특히 논쟁의 초.. 2021. 6. 22.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8. 청말의 사학 청말에는 공양학이 대두되긴 했으나, 고증학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청대의 고증학이 송학을 비판했다면, 청말의 공양학은 고증학이 송학을 비판하는데에 대한 반비판으로, 한학, 즉, 한대의 학풍을 중시했다. 이후 중국은 아편전쟁과 서세동점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대적 사학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서양 문화, 특히 진화론의 영향이 컸다. 중국은 당시 사료에 측면에서는 고증학적 자료 분석으로 기본 토대가 있었으나, 사관의 측면에서는 경전의 영향을 벗어나야 한다는 고증학적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의 강유위는 무술변법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공양학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 사상을 수용하고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실제로 근대적 방법론이 개시되는 것은 강유위의 제자였던 양계초부터였다. 양계초는 무술.. 2021. 6. 22.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7. 청대 사학 명나라 때는 사학에서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명 초에 『원조비사』가 구전되던 몽골족의 초기부터 징기스칸, 오고데이 칸까지의 내용을 기록해낸 정도였다. 물론 원조비사 역시 그 가치가 상당하지만, 이외에 역사서로서의 평가나 비중이 높은 사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 말부터는 이후 청 중기까지 경세치용과 실사구시의 학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명의 3위로를 들 수 있는데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가 그러하다. 황종희는 『명유학안』, 『명이대방록』 등을 지으며, 이후 청초 역사가들에 큰 영향을 줬고, 절동학파로 계승되었다. 고염무는 『일지록』, 『천하국군이병서』, 『음학오서』 등을 지으며, 실증적 학풍으로 고증학적 방법론의 길을 열었다. 왕부지는 『독통감론』, 『송론』 등을 지으며, 불교 인식.. 2021. 6. 22.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6. 송대 사학 송나라 때는 사대부 계층이 대두되며, 경제가 발달하고 사회가 개방되었다. 동시에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이러한 지식이 보급되었다. 도전건차(島田虔次)의 설에 따르면, 이 때의 송학은 정통주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 사변주의라는 크게 세가지의 특징을 가졌다. 정통주의 :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에 배타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 : 수기치인의 입장으로, 이는 강한 참여 의식을 끌어냈다. 사변주의 : 경전에 대해 묵수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해석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가치관의 문제를 중시하는 풍조를 만든다. 이런 풍조이 생기자, 송대의 학풍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문체의 변화 : 고문이 자리잡았다. 금석학의 발달 : 구양수의 『집고록발미』,..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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