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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7. 청대 사학

by 엽미술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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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때는 사학에서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명 초에 『원조비사』가 구전되던 몽골족의 초기부터 징기스칸, 오고데이 칸까지의 내용을 기록해낸 정도였다. 물론 원조비사 역시 그 가치가 상당하지만, 이외에 역사서로서의 평가나 비중이 높은 사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 말부터는 이후 청 중기까지 경세치용과 실사구시의 학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명의 3위로를 들 수 있는데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가 그러하다.

  •  황종희는 『명유학안』, 『명이대방록』 등을 지으며, 이후 청초 역사가들에 큰 영향을 줬고, 절동학파로 계승되었다.
  •  고염무는 『일지록』, 『천하국군이병서』, 『음학오서』 등을 지으며, 실증적 학풍으로 고증학적 방법론의 길을 열었다.
  •  왕부지는 『독통감론』, 『송론』 등을 지으며, 불교 인식론과 노장 사상에 영향을 줬다. 그는 청 말에 개혁 운동가들에 의해 주목받았다.

 청 초에는 역시나 정사인 명사가 저술되었는데, 이는 장기간 신중하게 추진되어 뛰어난 사서로 평가받는다. 여기서부터 청 학자들은 송학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외에도 대규모 관찬 사업이 이루어졌는데, 『패문운부』, 『강희자전』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백과전서적인 책으로는 『고금도서집성』이 만들어졌다. 또한 바로 『사고전서』가 쓰여졌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저술에는 도서 검열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다.

 

 고증학적 사학

 청대에는 고증학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장학성의 관점에서 절서학파와 절동학파로 분류되었다. 고염무가 절서학파로, 황종희가 절동학파로 이어진 것이었다. 절서학파의 인물로는 왕명성, 조익, 전대흔 등이 있었고, 절동학파로는 전조망, 소진함, 장학성이 있었다.

 순서대로 알아보자면, 왕명성은 고위관직까지 승진했으나 좌천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좌천 이후 30여년간 연사 연구에 몰두하며 고증학적 사학에 충실했다. 그는 정사뿐만 아니라 잡사나 소설, 목록이나 제자백가, 금석문까지 섭렵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십칠사상각』이 있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역사를 논했다. 또한 『아술편』에서는 경학을 포함하여 다방면에 걸쳐 다루었다.

 조익은 거인 급제 후 북경에서 수학하며 평판을 얻었다. 이후 진사에 급제했고, 고증학적 학풍으로 잡사나 야사는 철저히 배제했다. 『이십이사차기』에서 그는 역대 정사 전체에 대하 평론을 했고, 서술상의 오류를 지적했다. 또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했다. 『해여총고』에서는 다방면에서 독서와 연구를 통해 그때그때 얻은 결론을 정리했다.

 전대응은 고증학의 전성기 대표 인물로, 순 고증학적 사학을 완성했다. 그는 원사 연구를 위해 몽골어를 익히기도 했다. 또한 서양의 수학을 배워 연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저술로는 『이십이사고이』, 『십가재양심록』, 『잠연당금석학발미』, 『잠연당문집』 등이 있다. 그는 이후에도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전조망은 『명사』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로, 황종희가 구상한 『송원학안』을 완성한 인물이다.

 소진함은 사고전서 편찬 시에 사부(史部)를 주관한 인물로,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정사 부분을 찬술했다.

 장학성은 『문사통의』로 유명한 인물인데, 어려서부터 노둔했으나, 사서를 좋아했다. 그는 28세에 『사통』을 읽고 깨달아 이후 주균의 지도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41세나 되어서야 진사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강학과 학술 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여러 지방지 편찬에 관여했고, 『문사통의』를 쓸 때 널리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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