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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4. 사통

by 엽미술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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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역사이론서에 대해 알아볼텐데, 그 최초이자 동시에 핵심적인 것이 바로 사통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사통을 알아보며 역사이론서에 대한 것을 대신하겠다. 

 

유지기의 사통

 유지기가 저술한 『사통』은 사서의 비평과 연구가 주된 관심사인 저술로, 사평과 제대로 관련된 최초의 저서였다. 즉,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 이론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사통』에도 선례가 존재했기는 했지만 말이다. 특히 유협이 쓴 『문심조롱』은 유지기가 『사통』 저술의 계기 중 하나로 뽑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대로된 역사 이론서는 아니었다. 때문에 『사통』이야말로 위진남북조부터 당까지 이어지는 역사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겠다.

 유지기의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 또한 언급할 만한데, 그것은 그가 꽤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인습적인 유가 사상으로부터 비교적 해방된 사람이었다. 정통 유가 경전이 아닌 문헌에도 가치를 부여했던 점이 그러했다. 또한 그가 유가뿐만 아니라 도가 등 다른 부분에도 흥미가 있었으리라는 유추가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개방적 태도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다.

 또한 유지기는 비판적 태도의 중요성을 사학상에서 최초로 제대로 환기한 인물인데, 이전 역사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써대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지방지나 비역사적 기록에 대한 사료적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동시에 상호 비교, 교차 검증을 통한 객관적 서술을 위한 노력도 중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유지기는 역사 저술의 혁명가라고 느껴진다. 종래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고, 기존의 거의 모든 저서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이렇게 이런 과감한 비판을 할 수 있던 유지기의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필요한 인재상으로 생각된다. 이런 과감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뒷바쳐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통의 구조

사통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뉘어있는데, 내편을 쓰고 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사서의 차례, 역사 저술의 시비 분별에 대해 저술하였고, 외편에서는 사적의 원류를 밝히고, 고사기의 장단점을 감평했다. 그런데 이 외편은 형태로 볼 때, 미완성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유지기는 서문을 저술한 이후에도 정사편과 오시편 등 일부의 글을 첨가하면서 사통을 손보았다. 사실 사통의 경우에는 다년간 저술되었고, 시대상호적인 관련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엄밀한 집필 순서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내편에서 사서의 특정한 면을 개별적으로 언급했다면 외편에서는 사서 전체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비평했다. 그는 사서의 구성에 대해서도 견해를 남겼는데, 이것은 최초의 두 편 이후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통의 역사 이론

 유지기는 먼저 사학사를 정리하면서 당시 나온 사서들을 분류했다. 고금정사편이나 사관정치편으로 사학사가 정리되었고, 사서들은 6가와 2체로 분류되었는데, 6가란 상서가, 춘추가, 좌전가, 국어가, 사기가, 한서가였고, 2체란 기전체와 편년체였다. 여기서 기전체는 사마천에서 시작되고, 편년체는 좌구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사기와 한서를 비교했는데, 당시 평가 절하되어있던 사기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다만, 한서의 편에서 역사는 단대사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전체의 체제에 대한 평가로는 표는 기와 중복이 되므로 필요가 없고, 지는 도읍지나 방물지, 씨족지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체에 대한 평가는 사건의 서술을 간결하게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역사 서술이 현 시대의 문체로 쓰여져야 한다고 말하며, 고문을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또한 역사 서술에서 다섯 가지 오류를 제시했는데, 허설, 사실에 없는 일을 기록하는 것. 후안,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교묘히 감추는 것. 기수, 공문서 등에서 보이는 표현을 가지고 악정을 감추거나 혹은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자려, 사건에 대한 일방적 평가. 일개,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일관되게 평가하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였다.

 그는 역사 서술의 원칙으로 후한 시대의 순열이 말한 5지에 3과를 추가했다. 5지란 도의에 통함, 법령을 밝힘, 고금에 통함, 공훈을 드러냄, 현능(賢能)을 밝힘이고, 3과란 연혁을 서술함, 죄악을 밝힘, 괴이(怪異)를 밝힘이었다.

 그는 당의 사관 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전 한대의 경우는 사찬이었기에, 사관 스스로가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관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당에 이르러서는 궁궐 내에 사관이 위치하여 주변의 압력과 그 영향력을 받기 쉽다보니, 예전 한대의 사관들처럼 주관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본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그는 역사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3장을 말했는데, 바로 재주, 학식, 전문적인 식견 또는 사관(史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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