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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 사학사 간단 정리, 8. 청말의 사학

by 엽미술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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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말에는 공양학이 대두되긴 했으나, 고증학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청대의 고증학이 송학을 비판했다면, 청말의 공양학은 고증학이 송학을 비판하는데에 대한 반비판으로, 한학, 즉, 한대의 학풍을 중시했다.

 이후 중국은 아편전쟁과 서세동점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대적 사학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서양 문화, 특히 진화론의 영향이 컸다. 중국은 당시 사료에 측면에서는 고증학적 자료 분석으로 기본 토대가 있었으나, 사관의 측면에서는 경전의 영향을 벗어나야 한다는 고증학적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의 강유위는 무술변법의 중심인물인 동시에 공양학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 사상을 수용하고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실제로 근대적 방법론이 개시되는 것은 강유위의 제자였던 양계초부터였다. 양계초는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 활동 외에도 학술 활동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역사연구법』, 『청대학술개론』, 『선진정치사상사』 등을 펴내며 그는 금문학의 단계를 벗어나 서양 학문에 근접했고, 진보주의와 종족적 민주주의 측면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 학문의 단계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던 한계가 있었다.

 이후 양계초의 영향을 받은 호적은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유학하며 존 듀이로부터 실용주의를 배웠다. 귀국한 그는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며, 전통적 가치를 매도하여 5.4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며, 철학, 문학, 사학 등 학문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낡은 집을 철거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전통 중국을 해체하기 위해 국학(國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는 호적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고힐강 등에 의해 추진되며 역사학 발전에 기여했다.

 고힐강은 『고사변』 출판을 주도하며 근대적 방법론을 확립시켰다. 여기서 유학에 의해 미화되었던 상고사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유학의 영향과 결별하며 근대적 역사학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의고의 학풍이라 하는데, 이는 즉 옛 것을 의심해보는 학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힐강의 이 저서는 지나치게 부정적 관점으로만 일관되어 객관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존재했다.

 이후의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사학이 진행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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